
서울을 벗어나자
[1일차] 비를 뚫고 도착한 제천
동생이 ROTC 훈련에 들어간 사이, 도마뱀도 돌봐줄 겸 동생의 제천 자취방에 머물기로 했다.
새벽 2시에 제천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비가 무섭게 쏟아져서, 도로에서 물을 엄청 첨벙이며 왔다.
우리 집에 잠깐 두었던 도마뱀(나는 이 친구를 '게코쓰'라고 부른다.)을 동생 자취방에 다시 옮겨놓는 미션을 받았다. 안 그래도 진동에 엄청 민감한 친구인데 장거리 운전에 비까지 오다니... 3시간 내내 긴장한 채로 최대한 살살 운전하면서 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 친구의 호흡이 많이 빨라져 있었다. 극도의 긴장상태라는 의미이다. 진정할 시간을 좀 주고 다음날 다시 상태를 확인해봐야 했다.

밤+빗길 운전을 너무 오래했더니 피곤해서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방 창문이 워낙 커서 암막시트를 붙여놓은 덕에, 낮인지 밤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물론 낮이었어도 비가 콸콸 쏟아지는 판이라 엄청 어두웠을 것이다.
제천으로 내려오는 와중에도 비가 참 많이오는구나 싶었는데, 일어나서 보니 세상이 뒤집어져 있었다. 밤새 내린 비로 충청도 곳곳이 무너져내리거나 물에 잠겨있었고, 인명 피해 소식까지 들려왔다. 다행히 제천은 충청 끝자락, 그것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어서 피해가 그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출발 전 플래닝 때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쉬고 올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막상 지라를 켜보니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한바탕 끝내고 오후가 되니 배가 슬슬 고파졌다. 오는 길에 포장해온 코다리찜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밥을 먹고는 빗소리를 들으며 방에 누웠다. 시원한 방 안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저녁 늦게 집을 나섰다. 빨래방에 들러 이불을 돌리고, 근처 식자재 마트로 향했다.
무엇을 해 먹을지 정해오진 않았기에, 눈에 띄는 대로 물만두, 파스타, 아이스크림, 포스틱, 콜라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짐이 꽤 무거워진 채로 돌아오는 길, 세탁한 이불을 건조기에 옮겨 돌리고, 기다리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간단히 요리를 했다. 메뉴는 알프레도 파스타와 물만두, 그리고 하이볼. 요리에 소질이 없는 편이라 간단한 메뉴로 구성했지만, 나름 맛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영화 ‘승부’를 봤는데, 기대 없이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화려한 액션보다 머리를 쓰는 영화가 더 좋다는 걸 새삼 느꼈다. 바둑… 언젠가 꼭 배워보고 싶다.

오늘은 날이 저물고서야 돌아다닌게 아쉬워서, 내일은 해가 떠있을 때 한번 돌아다녀 봐야지.
[2일차] 복통을 이겨내고 둘러본 의림지
아침부터 배가 아팠다. 어제 먹은 코다리가 상온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요리를 어째 잘못했는지. 세상이 핑 돌 정도로 컨디션이 안좋았다. 심하게 아파서 강민님과의 업무 허들 중에도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해야 했다.
하루종일 배가 끓어서 속을 다 비워내고, 저녁때가 되어서 요거트를 먹었더니 좀 나아졌다. 그래도 이렇게 귀하게 낸 시간을 집에서 구르기만 하면 아쉽지 않은가. 6시가 다 된 시간에 몸을 일으켜서 의림지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 아니었지만, 역시 여름인지라 아직 날은 밝았다.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호수에서는 분수가 힘차게 솟아오른다. 서울에서는 잘 듣기 힘든 매미 소리도 굵은 빗줄기를 뚫고 퍼져 나왔다.

호수 둘레를 걷다가, 길가에 있던 큼지막한 정자에 올랐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비가 와서 인적이 드물 줄 알았는데, 나처럼 산책 나온 몇몇 사람만 보였다. 그래도 정자는 나의 독차지였다.
처마와 맞은편 난간을 액자틀 삼아 제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멀리 산이 보이고, 물에 젖은 나무들이 바람에 풀럭풀럭 흔들렸다. 물 위로는 동심원들이 수없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우산을 폈다. 둘러가는 길에 오리 세 마리가 삼각 편대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저수지를 가르다 차례로 물에 머리를 박는다. 귀엽군.
오늘은 마트에서 이것저것 많이 사갈 생각이다. 어제는 별 생각 없이 왔는데, 오늘은 앞으로 먹을 것들을 미리 좀 사두려고 적어서 왔다. 매일 마트에 가기에는 시간이 아까우니까.
계획을 세워 왔지만, 막상 가보니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 예정에 없던 재료도 덜컥 집어 왔다. 영수증을 보며 ‘이럴 거면 매일 사 먹는 게 싸겠다’ 싶었지만, 뭐 언제 또 이래보겠나 싶어서 영수증은 휙 던져버렸다.
오늘 저녁 메뉴는 메밀 소바와 탕수육이었다. 야구를 보면서 먹었는데, 일부러 급할 것 없이 느릿느릿 먹었다. 나는 밥을 빨리빨리 먹는 안좋은 습관을 가졌는데, 그것 때문에 자주 소화가 안되고는 한다.
[3일차] 행운의 청풍호반 케이블카
오늘은 주말이라 늦잠을 잤다. 사실 쭉 잔건 아니고 자다깨다 했는데, 마음이 편해서인지 수면 질은 상당히 좋았다.
오후 늦게쯤 소세지 몇개와 김치를 구워먹고는 집밖을 나섰다. 오늘은 충주호쪽으로 향한다. 엄마가 전에 제천에 놀러오셨을 때 그렇게 좋았다고 하신 청풍호반 케이블카를 타러 간다.
같은 제천이라 얼마 안걸릴 줄 알았는데 차로 45분은 달려서 가야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에 비까지 내리니, 산사태 뉴스가 머릿속을 스쳤다. 어젠가 산사태로 사람이 여럿 죽었다던데... 다행히 무사히 도착했고, 신기하게도 도착하자마자 비가 멎었다. 6시에 매표 마감인데 5시 50분쯤 턱걸이로 표를 사고 바로 후다닥 뛰어서 케이블카에 올랐다.

비 덕분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케이블카가 경사를 타고 올라가자, 충주호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호수 둘레가 워낙 구불구불해서 어느 쪽에서 보면 호수라고 하기엔 강 같기도 했고, 어느 쪽에서 보면 중국에서 많이 봤던 풍경이었고, 어느 쪽에서 보면 스위스에서 볼 법한 풍경이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아름다웠을 텐데 아쉬웠냐고? 그렇지 않았다. 딱 전망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다시 폭우와 낙뢰가 쏟아졌다. 잠깐의 시간 동안 비가 멎어 시원한 전망대에서 맑은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비가 내린 탓에, 에어컨 없는 케이블카 안이 시원했다. 폭우를 뚫고 내려가는 케이블 카 안에 고요하게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빗속에 캡슐을 타고 둥실둥실 떠있는, 소설같은 기분이었다.

지상으로 내려와서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비가 온다고 너무 집에서만 일하다보면 오히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밖에 나온 김에 원격 근무지에서도 원격 근무를 해보았다.
평일에 못다한 일들을 하나줄씩 쳐나가다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칠흑같은 어둠에 비까지 내리는 산길을 뚫고 가다보니 꽤 무서워서, 좀 더 밝을 때 출발할 걸 하는 후회가 되었지만 다행히 아무일 없이 집에 도착했다.
오늘 저녁은 어제 장봐온 재료들로 리조또와 스팸구이를 해먹었다. 레시피대로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또 생각나는 맛이다.
배를 채우고서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상반기 나의 삶에 대한 생각정리와 함께 하반기 목표를 세우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비록 결론은 내지 못해서 워케이션 기간동안 하루를 더 내어 생각정리를 마무리해야하지만, 요새 너무 바쁘게 사느라 나를 깊게 돌아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4&5일차] 원격 근무지에서의 원격 근무
아침부터 연락 업무로 바쁘게 보내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오늘은 그동안 미뤄뒀던 학생회와 학회 업무들 중 비중이 좀 큰 업무들을 해야했다. 오늘은 다행히 날씨가 개었다.
전에 먹고 남은 음식들을 간단하게 다시 차려 먹은 다음 차를 조금 타고 넓은 카페를 찾아갔다. 조금 습하기는 했지만 비가 내내 내린 덕에 공기는 맑았다. 앉은 자리에서 업무를 몰아 처리하다 보니, 졸음이 몰려왔다.

가족 톡방에서 오늘이 복날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서 치킨을 시켰다. 근처 BHC에서 콰삭톡을 시켜먹었는데, 치킨은 과자같이 바삭해서 좋았지만 프라이드 자체도 좀 맵고 같이 온 분말들도 매워서 막 추천하고 싶은 메뉴는 아니었다. (나는 매번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지만 성공한 적은 많이 없다.)
치킨을 먹으면서 다시 뉴스를 봤는데, 오늘은 경기 북부쪽을 비구름띠가 쓸고 지나갔나보다. 가평쪽에 산사태 뉴스가 많이 났다. 이 비가 언제쯤 멎을까. 그냥 비라고 하기엔 너무 매서운 날씨인 것 같다. 게임에서 궁극기를 쓴 것 마냥 지나가는 자리마다 지형을 부숴놓는다.
5일차는 오랜만에 평온한 날이었다. 비가 그친지 얼마나 되었다고 덥고 습한 기운이 몰려왔다. 비대면으로 돌렸던 학생회 회의와 스탠덥 미팅을 끝내고 잠깐 다시 누워서 숨을 돌렸다.
이제 닷새 정도 지났는데 지겹거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평온해진 것 같다. 이런 삶이 체질에 안 맞지는 않나보다. 계속 있으면 또 지루해지겠지만.
그래도 오늘도 쳐내야할 일들이 많아서 다시 몸을 일으켜 카페로 갔다. 손대기 쉬운 일들부터 처리했는데, 무거운 업무들은 아직 손을 못 대겠다. 항상 이게 고민이다. 시작이 너무 어렵다. 일을 많이 쪼갰는데도 어렵다. 데드라인을 정했는데도 어렵다. 여러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동기부여가 되어 일을 팍 시작하게 되는 컨디션 최상의 시점은 랜더믹하다.

[6&7일차] 새벽 산책과 작별
오늘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비대면 업무들이 줄을 이어서, 사실 안갔다기보다는 못나간 것에 가깝다.
졸음이 몰려와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빨래방에서 빨래를 돌려놓고 근처 24시 편의점까지 걸었다. 가는 길에 둘러보니 주변에 재밌는 것들이 꽤 많았다. 야구연습장, 족구장, 동전노래방, 브로콜리모양 비석, 공원과 시냇가. 좀 더 일찍 집 근처 산책을 해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에는 비 안 올 때 한번 와 봐야지. 전에 봄에 가족들이랑 왔을 때 제천이 정말 예뻤는데, 다음에는 봄에 와봐야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남은 파스타면을 처리하기 위해 파스타소스를 사러 갔다. 편의점에서 과연 파스타 소스를 팔지 안 팔지 몰랐지만 일단 가봤다. 없으면 산책 더 한 셈 치면 되니까! 집 주변의 편의점 3곳은 문을 닫았길래 좀 더 먼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예-! 샌드위치 진열대 뒷켠에서 파스타 소스를 발견했다. 심지어 세 종류나 있었다. 소소한 행복이었다.

오늘이 제천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돌아가기 전, 아쉬운 마음에 의림지를 다시 한 바퀴 걸었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지, 평소보다 훨씬 많이 걸었다.
집은 처음 상태로 돌려놓았다. 이불빨래도 하고, 청소와 설거지도 깨끗이 해두고, 남은 식자재도 동생 먹으라고 잘 정리해두고 왔다. 무엇보다 폭염 주의보 속에서 하루반정도 혼자 남겨질 도마뱀을 위해 케이지를 청소하고, 먹이도 주고, 물도 많이 뿌려주고 에어컨 꺼짐 예약까지 하고 정말 길을 나섰다.
미지근한 행복감이 내내 유지된 일주일이었다. 떠나는 발걸음이 정말 무거웠다.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 아쉬움과 뭉클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떠나기 전 기대했던 건 ‘신체적 회복’이었지만, 돌아와 보니 그것보다 훨씬 큰 건 감정적 회복이었다. 일과 쉼이 적당히 섞인 시간 속에서,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마주한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