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하면서 쉰다는 건 가능할까? – 2주간 워케이션 실험기(상)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죠. 쉬어도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느낌. 어딘가 멀리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느낌.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것인지 문득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
그냥 ‘지쳤다’는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죠. 몸은 멀쩡히 앉아 있지만,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일을 하고는 있는데, 이게 진짜 내가 하려던 일이 맞나 싶은 의문이 들고. 분명 내가 선택한 길인데도, 그 시작의 마음은 흐릿해져만 갑니다.
분명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바래왔던 무언가가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자꾸 손에서 흘러나가는 기분.
자꾸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정작 나 자신은 어디쯤 있는지 돌아볼 틈조차 없어지고. 주변도, 속도도, 책임도 그대로인데 마음만 뒤처진 채 따라가지 못하는 날들이 쌓여 갑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곤하고, 자고 일어나도 회복되지 않는 감정이 찾아오죠.
그럴 때 요즘의 우리는 그것을 ‘번아웃’이라고 부르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 말조차도 너무 흔해져서, 오히려 내 마음을 설명하기엔 조금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린 가끔 이런 상상을 하죠. “그냥 다 내려놓고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 회사 걱정도, 메일 알림도, 슬랙 메시지도 없는 어딘가로.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할 일 리스트도 없고, 당연하게 울리는 알림에도 움찔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으로요.
그래서 비요팀은 각자의 업무 방식을 최대한 존중 해왔습니다. 서로의 협업이 방해 받지 않는 선에서 자율출퇴근을 잘 활용하고, 꼭 사무실이 아니어도 스프린트 플래닝을 통해 계획된 업무를 각자가 편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저 역시도 그러한 기조하에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스트레스와 커다란 압박감들 속에서 어느샌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러다 팀의 지운님께서 먼저 제안을 해주셨어요.
"지호님, 한번 쉬고 오시는게 어때요?"
그런데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요.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요. 나와 함께하는 팀원들이 있고,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있고, 무엇보다 대표라는 직책에서 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때 팀에 만들어놓고 아무도, 한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제도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워케이션(두둥탁). '완전히 손을 놓는 게 어렵다면 잠깐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일상을 뒤엎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잠깐 다른 환경에 놓아보는 실험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저는, 진짜로 잠깐 사라져 보기로 했습니다.

워케이션 위치 고르기
워케이션에 좋은 곳은 어디일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는 '인도네시아'로 골랐습니다. 처음에 팀원 분들께 인도네시아로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상상도 못한 곳이라고 놀라셨었습니다ㅋㅋ
워케이션을 결정하고 처음부터 해외를 염두한건 아니었어요. 다만, 여유롭지 못한 예산 내에서 '다른 환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내보다 더욱 저렴한 물가의 어딘가를 찾는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인 GPT옹을 호출했습니다.

그렇게 도출된 지역은 2곳이었어요.
(1) 발리 그리고 (2) 치앙마이.
국내 여행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이국적인 환경, 많은 디지털 노마드들이 찾는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 있는 팀원들과의 협업에 무리가 없는 시차. 이런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두 지역 모두 워케이션지로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앞서 '인도네시아'를 골랐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최종 선택이 ‘발리’였다는 건 이미 눈치채셨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굳이 '발리'가 아니라 '인도네시아'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발리만 다녀온 게 아니거든요..
저는 여러 나라를 짧게 여행하며 ‘찍먹’하는 것보다, 한 나라에 머물며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살면서 해외여행을 자주 가긴 어렵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나라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한 나라 안에서 이곳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어떤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그 안에 또 어떤 낯선 풍경들이 숨어 있는지를 직접 보고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그리고 예전에 방콕을 다녀온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조금은 생소한 나라였던 인도네시아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계획 짜기
고백할게 있습니다...
저를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저는.....
대문자 P입니다!!!
숙소 예약 안하고 떠나기는 기본, 제주도를 갈 때는 지역도 안고르고 도착해서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정하는 무계획, 100% 느낌파입니다. (이 문장을 보고 한쪽 가슴이 심히 답답해지는 J 분들께 압도적 죄송..!)

처음 인도네시아 지도를 봤을 때, 막막했습니다.. '내가 알던 인도네시아가 이렇게 컸었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녀야하는거지.. 계획은 어떻게 짜는거지..' 그래서 그냥 수도를 먼저 가기로 했습니다.
혹시 인도네시아 수도가 어딘지 아시나요? 너무 쉬운 질문이었나요? 제 주위에서는 대부분 모르시더라구요.. 바로 '자카르타'입니다. 저는 자카르타를 몇 년 전에 대학원 동기분들과 외부 프로젝트를 하며 처음 검색해본 곳이었습니다. (ESG 전략을 고민하며.. 홍수가 많이 난다고..)
어쨋든 그렇다고 진짜 아무 계획도 없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의식의 흐름으로 빠르게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 일단 수도부터 가보자.
- 우리의 곽형(곽튜브, TMI: 아무한테나 '형'이라는 호칭을 즐겨씀)이 간 곳이 자카르타 근처에 있네?
- 오 마침 여기가는 고속열차가 최근에 생겼네? 기차 재밌겠다.
- 그러고 발리를 가려면 국내선 비행기를 타서 가야하나? 비행기 재밌겠다.
- 자카르타로 갔다가 발리에서 돌아오는 편도 항공권은 너무 비싼데 다시 자카르타로..
그렇게 짜여진 저만의 '느슨하지만 나름 뼈 있는 계획'은 이랬습니다.
자카르타 – 수도니까, 시작은 여기서
반둥 – 곽형 영상 보고 '어...? 여기 나도 가야겠다' 싶어서. 고속열차도 생겼다고 해서 도전.
다시 자카르타 복귀 – 발리 가야하는데 발리는 다른 섬이라 비행기를 타야함.
발리: 우붓 – 자연을 느끼고 싶었음. 마음을 비우고 싶어서 먼저 이쪽으로.
발리: 짱구(Canggu) – '그래도 바다는 보고 가야지!' 싶어서. 요즘 가장 핫(?)하다고 하길래
자카르타 복귀 → 한국 귀국 – 편도 끊으면 비쌈. 현실의 벽.
딱 봐도 철저한 전략은 없죠. 하지만 나름 "자연 → 도시 → 바다 → 다시 현실"이라는 흐름은 생겼습니다. 이 정도면 P치고 꽤 계획한 거 아닌가요? J 분들 기준에선 여전히 무계획일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매우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입니다.
잘 대충 기록하기
여행에 필요한 요소(비행기, 숙소 등등)을 예약하며 걱정되기 시작한게 있었습니다. 여행 기간이 길어지니 '이 많은걸 어떻게 다 기억하지...? 분명 다 까먹을텐데' 싶더라구요. 기록을 잘 하시는 분들께서는 노션이나 메모 앱에 적어두시거나, 바우처를 모두 인쇄해서 다니시는 방법을 활용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업무할 때 노션을 쓰기는 하더라도 여행을 계획하며 매번 기록을 해두는 것은 저에게 매우..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대충(?) 기록해둘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우리의 GPT를 활용하기로 생각했습니다. 마치, GPT를 저의 개인 여행 비서처럼 쓰는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 모든 여행 정보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예약을 할 때마다 예약 화면을 그대로 캡쳐해서 GPT에게 던지기로 했어요. 예약 할 때마다 캡쳐해서 던져두기만 하면 되니깐 매우매우 간편한 일이었습니다.

잘 떠나기 -> 실패
좋습니다. 아주 철저하고(아님) 완벽한(절대 아님) 계획까지 마무리 되었으니 이제 남은건 잘 떠나는 일입니다. 잘 떠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마무리 하고, 팀원들과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면 좋을 것들을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잘 떠났다기에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떠나는 주에 정부지원사업에서 주관하는 1박 워크숍이 있었고, 출국 직전에는 팀의 정기적인 컬쳐데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분명 떠나기까지 열흘이 넘게 남았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캐리어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출국까지 12시간이 안남은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출국 주차에 많은 일정들이 있음을 고려하여 그 전부터 준비를 해왔어야 했었겠지요.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었는데 그다지 계획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가방을 여는 순간 아주 깜깜했습니다. ‘내가 뭘 싸야 하지?’ 의외로 어렵더라고요. 출장은 아니니까 정장도 필요 없고, 그렇다고 완전 여행도 아니니까 너무 가볍게 챙기자니 불안하고. 이건 일하러 가는 건지, 쉬러 가는 건지, 애매한 경계에서 자꾸 짐 싸는 손이 멈추곤 했습니다.
사실 짐보다 더 문제였던 건 ‘정리’였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요. 업무를 팀에 잘 넘겨놓고 떠나야 했고, 한동안은 얼굴 못 볼 동료들과도 직접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고 싶었고.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떠나는 주차에 생각보다 많은 일정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하나씩 빠르게 마무리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조금씩 남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과연 지금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짐을 싸는 것도, 일정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사실 가장 준비되지 않았던 건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괜찮을까?’
'진짜 가도 괜찮은건가?'
‘비우고 간다고 했지만 진짜 비울 수 있을까?'
‘혹시 이 타이밍에 뭔가 놓치면 어쩌지?’
머릿속에 이런 질문들이 계속 맴돌았고, 그게 저를 끝까지 일에 붙들어 두고 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워케이션이란 건 그저 ‘장소를 옮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몸만 먼저 공항으로 향하게 된 거죠.

자 지금까지가 워케이션 기록의 서론이었습니다. 쓰다보니 쓸 이야기가 많네요(?)
(후속편 예고~ 예고~)
계획은 있었고, 루트도 있었고, 일정도 어느 정도는 짜놨는데…
막상 가보니까 일도 예상대로 안 됐고, 쉬는 건 더 안 됐고. 으아아~
근데 내가 뭘 하러 여기에 왔더라…?
그러면 이제 진짜 워케이션의 이야기가 담긴 후속편으로 찾아오겠습니다!


